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선생은 우리나라 미술사와 문화재 보존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들을 지켜낸 독보적인 인물로서, 단지 작품 수집가라는 한계를 넘어 한국 미술 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 후대에 귀감이 되고 있으며, 한국 미술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문화지킴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자세히 살펴보며,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그가 어떤 위대한 업적과 발자취를 남겼는지 심층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생애와 배경
전형필 선생은 1906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정선(旌善)입니다. 본래 집안은 서울의 명망 있는 갑부였으며, 재력과 학식을 갖춘 집안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민족의 문화유산 보존과 수집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많은 민족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보고, 전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우리 문화재의 수집과 보호에 몰두했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위대한 업적
① 민족 문화재의 수집과 보호
간송은 특히 일제강점기에 많은 문화재들이 일본 등 해외로 유출되거나 파괴되던 상황에서 거액을 들여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냈습니다. 그는 개인 재산의 거의 전부를 문화재 수집에 사용했고, 일본으로 넘어갈 뻔한 수많은 걸작들을 보호했습니다.
-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제70호)
- 세종대왕이 직접 반포한 훈민정음 창제 원리를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 당시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것을 막대한 금액으로 구입해 한국에 남겼으며, 오늘날 ‘한글 창제 원리’를 정확히 알게 해 준 역사적 보물입니다.
-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당시 일본으로 유출 직전 전형필 선생이 극적으로 매입해 보호했습니다.
-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국보 제527호) 등 우리 민족의 예술혼이 담긴 명화들을 보호하여 우리 곁에 남게 했습니다.
② 간송미술관 설립 및 운영
전형필 선생은 개인이 소장한 문화재를 일반 대중에게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1938년 서울 성북구에 ‘보화각(葆華閣)’이라는 미술관을 설립합니다. 이는 훗날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민족문화재 보존의 상징적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관이며, 지금도 국보와 보물 등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어 명실상부한 한국 문화재 보존의 보고(寶庫)입니다.
- 간송미술관은 현재까지도 일반인들을 위한 특별전 및 전시회를 지속 개최하여,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③ 한국 미술사 연구의 초석 마련
간송은 미술품 단순 수집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미술 연구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적극적인 학술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 당대의 미술 전문가였던 고유섭(高裕燮), 최순우(崔淳雨) 등 미술사학자들과 교류하며, 연구를 후원하고 지원했습니다.
- 특히 『고려청자명품전』, 『겸재정선전』 등의 특별전을 열어 체계적인 미술사 연구 및 학술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④ 민족문화와 정신적 가치 수호
전형필 선생은 문화재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절대 협력하지 않고 민족문화의 가치를 굳건히 수호했습니다.
- 해방 후 혼란기에도 문화재의 유실이나 훼손 없이 끝까지 보존하여, 민족문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업적 요약 정리표
문화재 보호 |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혜원전신첩, 단원풍속도첩 등 국보급 문화재 다수 보호 |
미술관 운영 | 1938년 국내 최초 민족 미술관 ‘보화각’ (간송미술관) 설립 운영 |
미술사 연구 후원 | 고유섭, 최순우 등 미술사 연구 후원, 특별전 개최 등 미술사 연구 기반 마련 |
민족문화 가치 수호 | 일제 강점기 및 해방 후 혼란기에도 민족정신 유지와 문화적 자긍심 수호 |
간송 전형필 선생의 역사적 의의 및 평가
간송 전형필 선생은 단순히 미술품을 수집한 개인 수집가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지켜낸 문화재 보존의 선구자였습니다.
- 한국 미술사학계와 문화계는 “전형필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 문화재와 미술품들이 해외로 모두 유출되었을 것”이라 평가하며, 간송을 “민족문화재 수호의 영웅”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 그의 수많은 수집품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 및 간송미술관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위대함을 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금액은 현대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그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이미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집안의 후손이었으며, 본인이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의 대부분을 민족 문화재 구입과 보호에 사용했습니다.
간송 선생이 생전에 투자한 금액을 정확히 특정짓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기록과 전문가들의 추산을 근거로 현대적 가치로 환산한 금액을 제시하면 일반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게 아래와 같이 설명해두었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당시 재산규모 및 투자 금액 추정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 최고의 갑부 중 한 명’으로 손꼽혔습니다.
선생은 당시 서울시 성북구 일대의 토지와 부동산 등 서울 중심부의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간송의 재산 규모
- 간송 선생은 서울 종로와 성북구, 청량리 일대에 광활한 토지 및 다수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 당시 부동산 보유 규모만도, 1940년대 당시 기준으로 수백만 원 이상의 거부(巨富) 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예를 들어, 당시 일반 직장인의 한 달 급여가 20~30원 정도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수백만 원의 재산은 당시로써 천문학적인 부(富) 로 볼 수 있습니다.
간송 선생의 주요 문화재 구입 금액과 현대적 가치 환산
전형필 선생이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사용한 금액 중 일부 대표적인 문화재 구입 사례를 통해 현대의 가치로 추정해 보겠습니다.
[실제 사례]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 간송 선생은 1940년에 당시 소장자인 경성 지역의 일본 고서적 수집상 ‘후지이 간타로’로부터 당시 1만1천 원 에 이 책을 구입했습니다.
- 당시(1940년경) 서울 중형 가옥 한 채 가격이 약 1천 원 수준이었으므로, 1만1천 원은 중형 주택 11채 분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 이를 2025년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서울 평균 중형 주택 가격을 약 10억원으로 가정할 경우 약 110억 원 내외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현대가치 추정액: 약 100억~120억 원 규모
[실제 사례]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 간송 선생이 1935년 일본 수집가로부터 구입할 당시 금액이 약 2만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당시 고급 대형 가옥 가격이 약 1천 원 내외였으므로, 2만원은 서울 최고급 저택 20채 이상을 살 수 있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습니다.
- 2025년 기준 서울 고급 주택 평균 가격을 약 30억원 내외로 가정하면 약 600억원 정도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입니다.현대가치 추정액: 약 500억~600억 원 규모
[실제 사례]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
- 혜원전신첩 역시 간송이 당시로선 거액인 약 2만원을 지불하여 구입하였다고 알려졌습니다.
- 앞서 계산과 같은 방식으로 추산하면 이 역시 약 500억원 이상으로 환산될 수 있습니다.현대가치 추정액: 약 500억 원 이상
간송이 평생 문화재 수집에 투자한 전체 금액의 현대적 가치 추정
당시의 기록 및 전문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간송 전형필 선생은 개인이 보유한 전 재산의 약 80~90% 이상을 문화재 보호에 쏟아 부었습니다.
- 당시 간송이 문화재 수집에 사용한 전체 금액은 약 100만원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 당시 100만원이면 서울의 최고급 저택 100채~200채 이상을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 위와 같은 방식으로 현대적 가치로 환산하면 최소한 수천억 원에서 1조 원에 육박할 수도 있습니다.
약 100만원 이상 (추정) | 약 5천억 원~1조 원 이상 |
간송의 투자 금액 이해를 돕기 위한 일반인 비유 예시
- 당시 서울의 일반 직장인(은행원·공무원 등)의 한 달 월급: 약 20~30원 수준
- 당시 고급 한옥 주택(대형 규모): 약 1천 원
- 훈민정음 해례본 구입비용(1만1천 원)은 당시 고급 주택 11채 가격에 해당
즉, 간송 전형필 선생은 현재 기준으로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사재를 문화재 보호에 사용한 것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투자 금액 정리표】
훈민정음 해례본 | 1만1천 원 | 약 100억~120억 원 |
청자상감운학문매병 | 2만 원 | 약 500억~600억 원 |
혜원전신첩 | 2만 원 | 약 500억 원 이상 |
평생 투자 추정 금액 | 약 100만원 이상 | 약 5천억~1조 원 이상 |
【간송 전형필 선생의 위대한 투자의 역사적 의의】
간송 전형필 선생이 민족문화 보호에 투자한 금액은 현재 기준으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규모입니다.
중요한 점은 금액의 크기보다도, 그가 사적 이익이나 명예가 아니라 오로지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기 위한 숭고한 목적만으로 막대한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을 통해 전형필 선생의 위대한 정신과 문화재 보호에 헌신한 노력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이었는지 많은 분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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